제가 처음 오귀스트 르누아르(Auguste Renoir)의 그림을 본 건 대학교 시절 미술사 수업을 통해서였습니다. 교수님께서 보여주신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는 단번에 제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 이후 르누아르라는 이름은 제게 ‘따뜻한 색채의 화가’로 각인되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그의 생애를 깊이 있게 알아보며, 그는 단순한 ‘예쁜 그림’을 그린 화가가 아니라, 극심한 신체적 고통 속에서도 예술을 멈추지 않았던, 놀라운 인간이라는 사실에 감동하게 되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그동안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삶의 이면과 예술에 대한 집념, 그리고 우리가 배워야 할 태도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프랑스의 화려한 인상주의 화가, 르누아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Auguste Renoir)는 1841년 2월 25일 프랑스 리모주에서 태어나 1919년 12월 3일 프랑스 남부 카뉴쉬르메르에서 78세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로서, 화려한 색채와 부드러운 붓 터치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특히 인물화와 일상 속 풍경을 따뜻하게 표현한 그의 작품들은 지금도 전 세계 미술관에서 많은 이들의 감탄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말년에 겪었던 극심한 관절염과 예술에 대한 끝없는 열정은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입니다.
시대를 넘나드는 역사적 배경
오귀스트 르누아르가 태어난 1841년은 조선 헌종 7년으로, 이 시기 조선은 안동 김 씨 세력의 권력이 강했던 시기였습니다. 당시 조선 사회는 서구 열강의 개항 압박이 시작되던 시기였으며, 아직 전통적인 봉건 체제가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반면 그가 사망한 1919년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해입니다. 3·1 운동이 일어난 해로, 일제강점기 하에서 한국인들이 독립을 위해 일어난 대규모 비폭력 저항 운동이었습니다.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계기가 되었으며, 한국 독립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르누아르, 인상주의 운동의 중심에서
오귀스트 르누아르는 1862년 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예술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클로드 모네, 알프레드 시슬레, 프레데리크 바지유 등과 교류하며 인상주의라는 새로운 미술 사조를 이끌었습니다. 인상주의는 전통적인 사실주의를 벗어나 빛과 색채의 변화, 순간적인 인상을 포착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르누아르는 이를 통해 인물과 풍경을 살아 숨 쉬는 듯한 생동감으로 표현하였고, 이는 그가 대중에게 사랑받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관절염과의 싸움, 그리고 예술혼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예술 인생은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50대 중반부터 그는 류머티즘성 관절염이라는 만성 질병을 앓기 시작했는데, 이 병은 그의 손가락과 관절에 심각한 변형을 일으켜 일상생활조차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화가에게 가장 중요한 손의 움직임이 제한되자, 많은 이들이 그의 예술 활동이 끝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르누아르는 이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손가락에 붕대를 감고 특별 제작된 붓을 사용하면서도 그림을 계속 그렸고, 오히려 그의 후기 작품들은 더욱 부드럽고 따뜻한 감성을 담아내게 됩니다. 그의 이러한 끊임없는 노력은 후기 작품에서 더욱 부드럽고 따뜻한 색채와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가족과 예술, 인간 르누아르
1890년 르누아르는 알린 샤리고(Aline Charigot)와 결혼하여 세 아들을 두었습니다. 그중 둘째 아들인 장 르누아르는 훗날 프랑스의 거장 영화감독으로 성장하게 되지요. 또한, 그의 모델이자 조력자였던 가브리엘 르나르(Gabrielle Renard)는 말년까지 르누아르 곁을 지키며 그의 창작을 도왔습니다. 그녀는 많은 작품의 모델로 등장하며, 단순한 뮤즈를 넘어 그의 예술적 파트너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그녀는 그의 말년까지 돌보며 르누아르가 예술 활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르누아르의 대표작과 숨겨진 명작들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대표작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1876)입니다. 이 작품은 파리 몽마르트르의 야외 무도회장을 배경으로 하며, 밝은 색채와 생동감 있는 인물 표현으로 인상주의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이 작품은 1990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약 7,800만 달러에 낙찰되어 화제를 모았습니다. 현재 가치로는 1억 5천만 달러 이상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또한 ‘피아노 치는 소녀들’(1881)도 대표작으로, 부드러운 색감과 따뜻한 분위기로 관객들에게 편안함을 전달합니다. 반면 덜 알려진 작품으로는 ‘루브시엔느의 길’이라는 풍경화가 있습니다. 이 작품은 르누아르의 초기 스타일을 잘 보여주는 소박하면서도 세밀한 묘사가 돋보이며, 그의 다양한 화풍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르누아르의 예술적 유산
오귀스트 르누아르는 예술에 대한 열정과 끊임없는 노력으로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로서의 입지를 굳혔습니다. 그의 작품은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 미술 애호가들에게 사랑받으며, 그의 예술적 유산은 계속해서 후대에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관절염으로 인해 극심한 신체적 고통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림을 그리며 예술에 대한 헌신을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작품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 세계 미술관에서 감상할 수 있으며, 그의 따뜻한 색감과 인간적인 정서가 담긴 그림들은 시대를 초월해 감동을 전해줍니다. 그의 삶과 예술에 대한 태도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길을 걷는 것, 그것이 바로 르누아르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큰 메시지일 것입니다.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작품 중 경매에서 가장 높은 가격에 거래된 것으로 알려진 작품은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입니다. 이 작품은 1990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일본의 사업가 사토 료에 의해 약 7,800만 달러에 낙찰되었습니다. 이는 당시 미술 작품 경매 사상 최고가 중 하나로 기록되었으며,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1억 5,000만 달러 이상으로 추정됩니다.
오귀스트 르누아르(Auguste Renoir)의 그림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는 1876년에 완성된 작품으로, 파리 몽마르트르 지역의 야외 무도회장의 활기찬 분위기를 생생하게 담아낸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 작품은 인상주의의 대표작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으며, 르누아르의 색채와 빛에 대한 탁월한 감각을 보여줍니다.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_ 오귀스트 르누아르, 1876 파리, 오르세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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